1. 파도의 범람
이번 작품은 신기한 게, 유독 파도의 범람이 잦았어요. 특히 작품이 끝나갈 때쯤 아주 큰 범람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바다가 안정되지 않고 계속 출렁이는데요, 파도를 조심하며 극의 마지막으로 돌아가 볼까요. 어두컴컴한 방,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잔인한 폭격 소리가 들립니다. 이따금씩 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닉의 발목 아래로는 쇠사슬이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아, 닉이 누구냐고요? 금융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투자 전문가입니다. 국적은 미국. 자신의 상사 대신 파키스탄 무장단체에게 납치당해 어느 골방에 감금 중입니다. 언젠가 그는 세계 자본 시장의 흐름을 담은 서류 뭉치들을 검토하며 커피를 마셨겠죠. 하지만, 과거가 무색합니다. 지금은 창 하나 없는 컴컴한 방에서 인질의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다 다리에는 상처를 입었고 발목에는 다시 도망가지 못하도록 채운 쇠사슬 소리가 날카롭습니다. 닉은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며 감금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니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지금 100일 하고도 수십 일 만에 자유를 얻은 상황입니다. ‘바시르’가 마침내 닉을 풀어줬거든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밖으로 나가지를 못해요. 하염없이 벽을 보며 서 있습니다. 그도 한때는 나름 희망찼던 때가 있었습니다. 납치되어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아 바시르가 누구냐고요? 좋은 질문이에요. 어! 파도가 다시 치네요. 사실, 코드네임 ‘보이지 않는 손’에서 파도가 처음 일렁이던 때가 바로 닉이 ‘바시르’와 처음 만나던 순간이에요. 자유를 얻었지만 그저 황망하게 서 있는 닉을 잠시 뒤로 하고 그때로 돌아가 봅시다. ‘바시르’와 닉이 만나던 그때로요. 파도 조심하세요!
2. 파도의 시작
닉은 순간의 오해로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일이 지나도록 닉의 석방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무장단체가 제시한 닉의 몸값이 워낙 높아서입니다. 몸값 협상은 계속해서 결렬되고, 설상가상 무장단체원 ‘바시르’는 닉에게 적대적이기 그지없습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자를 취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그는 닉을 거의 증오하다시피 합니다. 바시르는 영국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파키스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차별을 당했고 자본의 힘과 시장 논리 역시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닉은 어떻게든 바시르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바시르에게 닉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를 이용하며 돈을 벌고 파키스탄을 탄압하던 미국인, 증오의 대상입니다. 그러던 중, 닉이 거래를 제안합니다.
자신의 몸값 천만 달러를 직접 벌 테니 자유를 달라고요. 바시르는 고민하다 닉에게 자신도 팀원의 일원으로 함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며 제안을 수락합니다. 파키스탄의 혁명, 새 미래를 바라는 바시르에게 자금은 중요했습니다. 그는 닉에게서 금융시장의 원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양쪽 모두 썩 내키지 않는 동업이었지만, 둘은 그렇게 어두운 골방에서 주식 시장에 뛰어듭니다. 바로 이 순간이 파도가 처음 시작되던 순간입니다.
줄곧 유순히 너울지던 파도가 매서워지기 시작했던 것은 어느 날의 일입니다.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그에 따라 사망자가 속출하고 파키스탄의 정치·경제 상황은 어지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이에 따라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닉은 이를 이용합니다. 주가가 반등하기 전 옵션 거래를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인데요, 계속 떨어질 것만 같았던 주가는 어느새 다시 오르고 시장이 잠시 중단됩니다. 6분, 단 6분 만에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정상화되었고 둘은 큰 수익을 냈습니다. 바시르와 닉은 뛸 듯이 기뻐합니다. 이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커진 파도 소리도 귀에 들어왔어요. 테러가 일어났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누군가 삶의 기로를 오가는 와중에 누군가는 그걸 이용해 돈을 벌었다는 거, 이게 맞는 일인가요? 언제부터 죽음이 돈이 될 수 있었나요. 세상에는 많은 탄생과 죽음이 있죠, 인류의 돈의 역사도 그것과 함께 계속 있어 왔을까요? 참 씁쓸했습니다. 둘의 위험한 거래를 경고라도 하듯 파도가 매섭습니다. 하얀 물보라가 끊임없이 부서지네요. 잠깐 피해야겠습니다.
“변하지 않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돈이 사람을 사로잡는다는 거”. 닉이 했던 말인데, 자꾸 기억에 남아요. 복선이었을까요? 작품을 지켜보며 제발 저 말이 복선이 아니길, 지나가는 말이길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지만 불안하게도 바시르의 말이 계속 맴돕니다. “당신 손에 피 묻힌 거 아니잖아요.”
3. 다시, 파도의 범람
이 사건이 있은 이후 내내 파도가 멈추지 않았어요.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네요. 지금 이동은 조금 위험하겠어요. 저번 파도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돈’을 중심으로 인물들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무장단체의 수장, 이맘 살림은 돈에 눈이 멀어 사유재산을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의를 위한다던 바시르는 파키스탄의 봄, 더 좋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테러를 기획했고요. 그 사이 닉은 ‘쓸모없는’ 인질이 되었습니다. 시장 논리를 파악한 바시르는 이제 닉이 없어도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더 이상 몸값을 벌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고 닉은 그저 골방에 방치된 채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극을 처음 열던 때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그토록 원하던 자유. 네, 닉은 결국 자유를 얻었습니다. 긴 시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바시르가 오랜만에 나타나더니 흔쾌히 풀어줬어요. 도망갈 수 있도록 돈도 쥐여줬습니다. 허겁지겁 방을 나서려던 닉. 그의 뒤로, 골방의 벽에 전 세계의 화폐 모습이 지나갑니다. 주식 시장 그래프와 복잡한 숫자, 돈과 계산들이 빼곡히 방을 채웁니다. 닉은 멍하니 무대를 바라봅니다. 내 손에 피를 묻힌 건 아니다. 아닌가요? 내가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이 돈을 움직이고 그 돈 끝에는 결국 사람이 있습니다. 거리에는 총성과 폭격 소리,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가득합니다. 닉과 바시르가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은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것이 되어 세상을 뒤흔듭니다. 닉은 아마 그 날 처음으로 경험한 것 아닐까요? ‘보이지 않는 손’과 조우하는 순간을요.
작품을 보며 자꾸 발밑을 보게 되더라고요. 파도 때문에 엉망이 된 신발 때문이 아니라요, 내가 밟고 있는 땅이 생경하게 느껴져서였어요. 내가 밟고 있는 땅이, 그 시장 밑에 누군가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요. 지금도 시장은 찰나의 순간을 지나고. 지금도 누군가는 돈을 벌고 있겠죠? 또, 아무도 조명하지 않는 죽음 역시 계속해서 생기고 있는 거겠죠. 환희의 순간과 좌절이 이토록 잔인하게 교차된다는 거, 정말 잔인한 것 같아요. 돈은 뭘까요? 돈, 중요하죠.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며 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돈’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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