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셋>

 

 

 

솔직히 별 내용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재회 이후의 만남을 풀어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비포 선라이즈>의 감동이 너무 크기도 했고.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기대 이상의 영화였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상은 시니컬하고 좀 더 능글맞아졌다고 해야 하나, 나이가 들어 여유가 많아진 두 사람인데 후반부로 갈수록 사랑 앞에선 나이가 중요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제목이 비포 선셋인 만큼 해가 지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그래서 밝은 상태에서 화면이 어두워진다. 제시가 비행기를 놓쳤을지는 정말 알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제시가 자신의 책에서 결말을 열어놨듯이 이 영화도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는 게 재밌었다. 그리고 이 열린 결말이 나는 너무 좋았다.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모든 걸 드러낸 셀린의 모습이 말이다.

정말이지 셀린은 자신의 모든 걸 표출한다. 그런 걸 다 내보이기 쉽지 않은데, 그걸 다 표출하는 이유는 이미 두 사람이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의 어떤 모습을 봤고 그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열리고 감정이 고조되면서 나타나는 시너지와 분위기, 그 모든 게 너무 잘 보여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의 대화를 쭉 보다보면 제시는 말을 하기 보단 듣는 편이고 셀린이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말하면 제시가 중간중간 리액션과 농담을 던진다. 제시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셀린이 제시의 삶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그 스스로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있었고 후반부에 가서 감정이 격해져서야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다.

사실 제시가 완전히 솔직하게 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 그 나름대로 상처가 많아 보이긴 하지만 선셋은 유독 셀린에게 공감이 많이 갔다. 제시가 사랑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게, 결론만 놓고 보면 정말 유부남 주제에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그 모든 서사와 상황이 이해가 가기에. 12월 16일 비엔나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거다. 캐릭터를 미워할 수 없게 잘 만들어놨다.

덧붙여선 대화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상호작용과 그에 따른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들도 볼만하다. 이건 비포 선라이즈 만큼이나 잘 짜여진/즉흥에 순간을 캐치한 것들이겠지!

그리고 초반에 책방에서의 제시의 대사들이 그냥 전부 다 자전적인 이야기들이었어서 설마, 했는데 진짜여서 그냥 헉 했던 거 같다. 이런 대사적인 것들 말고도 미장센이 너무 아름다운 영화였다. 배경으로 나오는 파리 곳곳까지도. 잘 만든 영화는 이런 영화를 보고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대사. 그 날 하루가 내 모든 걸 앗아간 거 같다는, 그래서 내 마음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거 같다는 셀린의 말. 이 부분이 제일 찡한 부분이었다. 감정의 클라이맥스 부분이기도 했지만!

인간관계와 사랑과 삶과 죽음과 시간과 인생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잔뜩 담아 마음을 비우려고 영화를 켠 본래의 목적에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잔잔한 위로를 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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