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도의 시작

1926년 8월 4일, 시모노세키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당대 최고의 성악가 윤심덕과 엘리트 극작가 김우진이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둘의 투신은 각종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었고 이들의 죽음을 두고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하지만, 둘의 죽음을 단언할 수는 없었는데요, 둘의 시신을 그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의 찬미’는 두 사람의 비극적 인연을 되짚어 돌아갑니다. 둘이 서로를 처음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 그리고 둘의 관계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가는 과정까지. 그리고 여기서, ‘사내’라는 역의 인물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고국 순회 공연에 올릴 연극을 같이 하기로 손을 잡으면서 처음 만났는데요, 둘 사이에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가 둘을 적극적으로 연결해주었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이상적인 오작교처럼 보이죠. 하지만 어딘가 서늘한 웃음이 눈에 띕니다. 여러분, 새벽의 파도를 본 일이 있으신가요? 새벽의 파도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것이 심연을 삼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금방 햇빛을 품을 것처럼 차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내’는 새벽의 파도를 닮았습니다.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어요.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언뜻 보면 그냥 장난이 심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아, 맞아요. 이 시점에서, 이번 파도의 특별한 점을 말해볼까 합니다. 바로 파도의 시작이 파도의 끝을 부르고, 끝이 시작을 만드는 이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건데요. 윤심덕과 김우진, 둘의 만남은 운명적인 사랑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오는 시계추와도 같습니다. 저는 이번 작품만큼 극을 보며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고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바람을 타고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지만, 동시에 고독하고 서늘한 파도 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공간을 채우는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조심하세요! 파도가 치고 난 갑판 위는 미끄럽습니다. 천천히 이동해볼까요?

 

2. 파도의 분열

아까부터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게 파도가 험악해지겠네요. 파도의 모습을 잘 지켜보세요. 파도가 변하면 잠시 몸을 숨겨야 합니다. 우진과 심덕. 행복할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의 사이에도 갈등이 생깁니다. 그리고 사내는 점점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진은 고국 순회 공연에서 올릴 작품 ‘사의 찬미’가 공연의 취지와 맞지 않게 결말이 지나치게 비극적이라는 점을 들며 수정을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내는 우진에게 절대 수정을 거치지 말고 반드시 그대로 올릴 것을 강요하죠.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심덕에게 불순한 추파를 날리고, 우진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흘립니다. 심덕은 혼란에 빠지고 둘 사이에는 균열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내가 있습니다. 내내 파도를 만들어오던 물길이 갈라집니다. 뭉치려던 파도는 부서져 이내 산산이 흩어지고, 무서운 파열음을 만들어냅니다. 파도가 이렇게 심할 때는 잠시 몸을 피할 곳을 찾아야 합니다. 파도가 심덕과 우진, 사내 사이를 흐릅니다. 심덕과 우진은 놓은 손을 다시 맞잡을 수 있을까요?

 

 

 

3. 파도의 범람

파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몰려오는 게 금방이라도 배를 삼킬 것만 같습니다. 위험천만한 갑판 위, 그곳에 우진과 심덕, 그리고 사내가 있습니다. 김우진은 사내가 사람들을 조종해 파멸로 이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과 심덕을 만나기 이전에도, 숱한 사건들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리고 사내가 건넨 연극 속 결말처럼 자신과 심덕과의 관계도 비극적으로 끝이 날까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문인지 우진은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이로 인해 심덕에게도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심덕은 그런 우진을 보며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 엘리트였던 심덕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지쳐가고 음악적인 포부를 펼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합니다.

 

둘은 어긋납니다. 하지만 모든 게 사내의 뜻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진이 심덕에게 새로 쓴 결말을 보여주며 사내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심덕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1921년 여름에서 시작했던 극은 시간이 흘러 비로소 1926년 8월 4일의 그날로 돌아옵니다. 시간은 둘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사내는 집요하게 둘을 쫓아 같은 배에 올랐고 셋은 결국 배의 갑판 위에서 대치합니다. 더 이상 피할 수도, 상황을 다시 쓸 수도 없는 순간. 우진은 말합니다. “우린 새로운 세상으로 갈 거야. 준비됐어?” 뒤이어 심덕과 우진은 함께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새벽 4시, 아직은 어두운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진 둘을 뒤로하고 거센 파도가 칩니다. 파도는 둘을 자유로 데려다주었을까요?

 

앞서 포스터 속 풍경이 왜 뒤집혀있는지, 오른쪽 하단의 풀처럼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뒤집힌 풍경은 우진과 심덕이 바다에 몸을 던질 때 그들의 눈에 비친 바다의 모습입니다. 풀처럼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속눈썹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걸음에서 그들 눈에 비친 비뚤어진 세상, 그곳에서 그들은 행복할까요? 뮤지컬 ‘사의 찬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