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파도의 몸짓과 이동 양상을 통해 범람을 기록해왔는데요, 오늘은 조금 다르게 해볼까 합니다. 이번 파도는 헨젤과 그레텔 기법을 동원해서 기록해볼까 해요. 하하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나요? 헨젤과 그레텔에게 과자 부스러기가 있었다면 지구대원에게는 ‘대사’ 부스러기가 있습니다. 지구대원의 마음속 깊은 파도를 치게 했던, 극 속 대사를 따라가 봅니다.
파도 하나, “그래 걔네도 애들, 우리도 애들”
극 중 시고니 위버(헬멧 B)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미워하기 시작하면 생각을 할 수가 없다고. 전경들이 밉지만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 뒤에 있는 더 중요한 걸 보지 못하게 된다고. 저는 사실 처음에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백골단, 하얀 헬멧에 청카바, 청바지, 하얀 운동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잡아가는 그들을 볼 때마다 너무 무서웠고 화가 났거든요. 심지어 연극에서 제가 본 건 참상의 지극히 일부분이었는데도 말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저렇게 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폭력적인 진압을 일삼고 자유를 억압하던 전경들을 보면서 틀림없이 정말 못되고 악마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백골단 대장으로 불리던 사람이 김수영 시인을 좋아하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음악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다른 전경은 어머니의 잡채를 보고 눈물 흘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더라고요. 머리가 띵-하고 복잡해졌어요. 그리고 그때 “미워하기 시작하면 생각을 할 수가 없거든.” 시고니 위버의 말이 이해가 갔습니다. 내가 ‘미움’이라는 감정에 집중하다 놓친 것들, 정말 직시해야 할 문제는, 대상은 사실 그 배후에 있다는 것을요. 이해하고 나니, 당대 사회가 더 악랄하게 보이더군요. 폭력으로 진실을 감추고 논점을 흐리고자 하는 그 열망이 너무 투명해서 불쾌했습니다.
학생들이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소주병을 비우며 말합니다. “안 미워할 수 있을까? 내 옆에 있는 니 머리에서 피나면, 내 손이 밟히면, 안 미워할 수 있을까? 걔네도 머리에서 피나면, 손이 밟히면 우리가 밉겠지” 자유를 위해 투쟁하면서 사회가 조장한 모순 속에 무방비하게 방치된 학생들. 그 모습에서 수많은 시고니 위버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저는 아직도 그 장면이, 그 대사가 눈에 밟혀요. 극 내내 공통적으로 나오는 대사가 있어요. “걔네도 애들, 우리도 애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전경의 얼굴을 떠올릴 때, 막연하게 무시무시하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극이 보여주는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더 무서웠어요. 그리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담보로 패를 가르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당대의 보편적 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자행했던 폭력.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고통받고 상처 입었고 아직도, 그 상처가 보이는 듯합니다.
파도 둘, “나는 이 방을 나간 적이 없었다. 분명히 나갔었는데, 나간 적이 없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일명 ‘미친 개’. 전경들과의 대치에서도 밀리지 않는다는 시고니 위버. 그런데 그에게도 어리숙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1987년, 대학교에 처음 입학해 운동을 하던 때였는데요. 그때는 지금처럼 싸움을 잘하지도, 멋있지도 않았습니다. 전경에게 머리채를 잡혀 이도저도 못하던 자신을 구해줬던 떡볶이 선배, 그리고 전경들을 피해 그 선배와 서점 지하 창고에서 몸을 숨겼던 날. 하지만 결국 정체를 들켜 끔찍한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던 날. 시고니 위버에게 그날의 기억은 평생의 짐으로 남았습니다. 4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하던 신입생에서 어느새 전투조 대장이 되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생생해집니다. 아마 시고니 위버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그 선배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하루도 없었을 거예요. 매일 새벽 잠에 들기 전, 밥을 먹기 전 그 서점 지하를 찾아갔겠죠. 지하 창고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이 방을 나간 적이 없었다. 분명히 나갔었는데, 나간 적이 없었다.” 시고니 위버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아니 정확히는 울부짖었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생각해보면, 다 어린 학생들이잖아요. 지금 제 또래의 학생들이었을 텐데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얼마나 가슴 졸였을까요. 자신의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후배를 숨겨주고 대신 전경들과 대치하다 생사도 모르게 끌려간 그때, 그 선배의 결심이 얼마나 떨리고 무서운 것이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4년 뒤 1991년, 아직도 졸업을 하지 못한 시고니 위버를 보며 가슴이 아팠어요. 그는 4년 전 신입생 때도, 4년 후 미친 개일 때도 소망이 같았어요. 환히 웃으면서 학교생활하고 멋지게 졸업도 하고 그렇게 학교를 다니는 거. 그게 소원이었어요. 그저 친구들이 죽지 않고 후배들이 웃으며 학교 다닐 수 있는 그런 거. 그리고 그게 아직도 그의 일상이 아니라는 거. 그래서인지 시고니 위버가 외치는 “나는 학교로 돌아간다! 언제 졸업할지 모르겠지만 꼭 학교로 돌아가서 친구들이랑 새 학기 맞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럴 거다. 내 친구들도, 서점 사장님도, 선배도 돌아올 거다!” 이 대사가 정말 절절하게 들렸습니다. 그들에게 ‘학교’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소중했을까. 저도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돼요.
파도 셋, “너는 너무 커피를 잘 탔어.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슬펐어”
이 극이 좋았던 이유 중 마지막은 극이 민주화 역사 속의 잊힌 여성을 조명했다는 점입니다. 백골단은 대학 캠퍼스에 일명 쁘락치를 심어놓습니다. 헬멧 C, 일명 ‘빨간 삼각건’을요. 시고니 위버가 빨간 삼각건을 의심하게 된 건 그가 탄 커피를 마신 후부터였습니다. 학교에 갓 입학한 새내기가 탄 커피라고 하기에는 너무 맛있었던 거예요. 이상한 거죠. 커피를 많이 타본 솜씬데, 어쩌다 많이 탔을까. 그렇게 뒤를 밟다가 그가 전경의 쁘락치임을 알게 됩니다. 삼각건을 의심하게 된 이유가 행적이 수상해서 같은 이유가 아니라 커피를 너무 잘 탔다는 이유였다는 게. 너무 씁쓸했습니다. 백골단 대장이 시고니 위버를 체포하려고 도착했을 때, 삼각건에게 하던 말. “커피나 타 이 XXX아” 시고니 위버가 전경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일 때 엎드려 바닥을 치던 헬멧 C. 시고니 위버와 빨간 삼각건,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인물. 그리고 그 둘이 교차하던 1991년의 서점 지하 창고. “도대체 얼마나 많이 탔으면 얼마나 커피로 야단을 맞으면 그렇게 되지. 이거 되게 웃기잖아. 근데, 나는 너무 슬프더라. 너는 너무 커피를 잘 탔어.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슬펐어.”
<더 헬멧> 룸서울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킨 결단, 그것의 연쇄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민주화를 위한 일념, 수많은 이들의 투쟁, 자기 자리에서 작든 크든 최선을 다한 시도들. “가장 빡센 곳에서 저항하던” 사람들.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며 오늘의 일지를 마무리해보려 합니다. 룸서울 속 헬멧 B의 닉네임은 왜 ‘시고니 위버’일까요? 이상 <더 헬멧>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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