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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개인의 이익에 집중한 나머지 그런것들을 잊고 살아가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고 느꼈는데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말을 기억하여 만들어진 공연이 있습니다. "전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나는 기억되고 있습니까? 음악극 <태일>입니다.
음악극 <태일>은 장우성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이 뭉친 목소리 프로젝트의 첫 작품입니다. 일단 목소리 프로젝트를 살펴보자면, 선한 영향력을 실천했던 실존 인물의 삶을 공연으로 만들어 그들을 재조명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처음 바라본 인물이 바로 ‘전태일’인데요. 그의 목소리를 담은 음악극 <태일>은 2017년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트라이아웃 공연을 마친 후 2018년, 2019년 우란문화재단과 전태일 기념관에서 각각 짧은 기간 공연을 올리고 2021년 마침내 3개월 동안 대학로 TOM 2관에서 첫 장기 공연을 올렸습니다. 저도 계속해서 <태일>이 좋은 극이라는 이야기만 들어오다가 이번에서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는데요. 보고 나서 왜 다들 이 극을 한 번만이라도 봐 달라고 얘기했는지 바로 깨달았습니다.
먼저 시놉시스를 살펴보자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태일>은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전태일에 대해 다들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공연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학창시절 수업을 제대로 들었다면 역사책이나 사회책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이름.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의 업무 환경을 고발하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열사 전태일. 저의 기억 속의 전태일도 딱 이렇게 남아 있었습니다. <태일>을 보기 전 이미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기에 극 또한 숭고하고 무겁게 진행될 거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태일>은 소년 전태일, 청년 전태일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이 속엔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밤에 청옥(학교)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동생이 생각나 어린 여공들에게 자신의 버스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는, 어머니와 마루 밑에서 얘기하다가 잠이 드는 등 평범한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청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N을 위하여 ‘보도지침’ 편에서도 말했듯이 극을 보는 내내 저는 같은 상황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저는 부당한 일이 생겨도 혼자 화내고 삭히지 어딘가에 이를 신고하고 알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냥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태도들이 쌓여 잘못을 한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남의 권리를 침범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훨씬 크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책임한 행동이지 않을까요? 1970년 태일의 나이는 22세로 지금의 저와 같은 나이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동하는 방법은 다르다지만, 저렇게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거지 같은 세상이 조금은 바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앞에 서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을 지지하고 감사함을 느끼며 그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무시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을 때 이를 묵살하는 사람들. 이것은 1970년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과 며칠 전에도 아주 가까이에서 일어났는데요. 바로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주장하는 시위에 대한 서울시의 대응입니다. 장애인들은 그저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 오를 뿐인데 ‘시민’들의 출퇴근길을 방해한다며 시위를 막기 위해 혜화역 엘리베이터를 일부 중단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하철 바로 앞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음'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변명을 내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는 것도 어이가 없습니다. 공약으로만, 말로만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하면 뭐합니까. 공약 실현은커녕 용기를 내어 일구어낸 투쟁마저 짓밟으려고 하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참 답답해지곤 합니다. 이에 더불어 과거의 목소리를 왜곡하려는 행동들도 뻔뻔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그런 생각을 가진 창작진들은 <태일>과 같은 작품을 보고 좀 반성했으면 합니다.
좋은 극과 잘 만들어진 극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음악극 <태일>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극인 것 같습니다. 좋은 메시지를 어떻게 연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이기에 몇 가지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태일>이 잘 만들어진 극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목소리입니다. 위에 첨부한 캐스팅보드를 자세히 보면 역할 이름 대신 OO ‘목소리’ 역이 적혀있습니다. 태일 목소리 역의 배우는 태일의 이야기를, 태일 외 목소리 역의 배우는 동생 순덕이, 부모님, 청옥 같은 반 부실장, 노동청 직원, 어린 여공, 친구 김개남 등 태일의 주변 인물이 되어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는 연출이 실존 인물을 훼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좋았습니다.
이런 연출에 맞춰 극본도 어떠한 과장도 없이 오로지 태일이 남긴 수기와 주변 인물들의 증언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혹여나 태일이라는 사람을 사실과 다르게 표현하여 왜곡할까 싶어 창작진들이 엄청 공부하고 또 고심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어떤 작품을 만들 때 당연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부분들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며 실존 인물의 본심을 모욕하는 작품들이 최근에 종종 보이는 상황에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 태도가 무대에서 느껴져서 <태일>을 만들어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다시 한번 참 소중한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객석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초들이 놓인 걸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태일이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배우들이 관객의 발밑, 책상 위 등 촛불을 하나씩 추가해나갈 때마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던 태일의 마음속에도 불꽃들이 하나둘 켜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공연 중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근로기준법 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었던 시간이 생각이 납니다. 배우가 퇴장하고 빈 무대에 곳곳의 촛불만이 일렁이는데, 흔히들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표현을 쓰곤 하잖아요. 마치 그런 기분이었어요. 세상이 많이 변했긴 하지만 아직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떠오르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더 나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촛불을 꺼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나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넘버 ‘내일이 되면’을 부르던 태일 목소리 역의 배우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가 들리는 광장 쪽으로 퇴장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때 우리 모두가 아는 마지막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약 사실적으로 보여졌다면, 실존 인물의 삶을 극적으로만 표현하려고 했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들거나 극이 주려고 했던 이야기의 의도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 배역이 아닌 배우로서 무대에 존재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얘기하면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과 더불어 평화시장 여공들이 어떤 공간에서 일하고 있는지, 그렇게 얻은 월급으로는 풀빵 하나도 먹기 어려웠다는 이야기 등 한정된 공연 시간 내 이야기로 다 풀어낼 수 없는 부분들을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창작진은 이러한 독특한 구조를 두고 태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태일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했다고 설명하는 걸 듣고, 목소리 프로젝트의 원래 목표가 극 구조로도 나타난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오늘의 ‘원동력 타임’을 듣는 것도 소소한 재미로 느껴졌습니다. 원동력 타임은 가난으로 인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밤낮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와중에도 태일이 희망을 잃지 않은 건 가족이라는 원동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로 시작이 되는데요. 이때 배우들도 자신의 원동력을 이야기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밤새 연기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시간, 날씨가 좋아 일찍 출근해 거리를 걸었던 기억, 근로자의 날에 <태일>이라는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경험 등 정말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전해주는데요. 저도 원동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 거창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하루는 되게 소소한 행복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소소한 행복들로 힘들었던 걸 조금이나마 툴툴 털어버리고 내일을 또 살아갈 수 있었던 게 생각나면서 그럼 나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족이 원동력이었던 태일처럼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솔직하게 말하면 요즘엔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매일 물밀 듯이 밀려와서 스스로 힘을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파도에 쓸려가듯이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라 원동력이 무엇인지가 바로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제가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고민해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 사랑은 정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는 듯해요! 그 사랑은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좋아하는 배우가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수집하는 작고 아기자기한 귀여운 것들이 될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이든지 그를 생각하면 울상이다가도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연극, 뮤지컬을 좋아하다 보니 관극이 원동력이 되는 듯합니다. 재밌는 공연을 한 편 보면 공연이 끝나는 순간부터 후기 쓰면서 계속 곱씹다가 잠이 들고 또 보고 싶으니까 그 기억으로 일하면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닷 표를 사고 또 보러 가고 곱씹고 일하는 무한의 굴레에 빠져버리고 말죠. 물론 항상 만족스러운 관극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제가 극장에 가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약 두 시간 만큼은 핸드폰 전원도 끄고 세상의 모든 연락과 단절된 채로 새로운 세상 속으로 흠뻑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 연뮤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뭔가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현실 속 걱정거리들이 리프레시되는 기분이랄까요? 또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와는 달리 공연이 올라오는 기간에만 볼 수 있다보니 사랑하는 극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 기쁜 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년 가을에 제가 가장 사랑하는 극인 <히스토리 보이즈>가 돌아온다고 하는데요! 아직 21년도 끝나지 않았고 가을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돌아온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제가 2022년을 살아갈 이유, 지금부터 돈을 차곡차곡 모아둬야 하는 이유가 생긴 거죠. 다시 만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셰필드 친구들아, 기다려봐. 내 사랑이 이겨! 아자자~!
그리고 또 문득 생각난 건 성취감. 최근에 #가보자고, 내가 해냄! 등의 밈들이 유행하면서 불평만 하던 일들을 그래도 이겨내려고 스스로 주문을 걸고 있는데, 그렇게 하나둘 하다 보면 어느새 해야 할 일들이 끝나갑니다. 그럼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면서 꽉 찬 하루를 알차게 보낸 뿌듯함에 저 자신이 대견스러워져 내일도 열심히 살아가야지 다짐을 한답니다. 물론 자아도취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막연한 미래를 낙천적으로 살아내는 건 좋은 거 아닐까요? <태일>의 넘버 ‘내일이 되면’처럼 알 수 없는 미래가 원동력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벅찬 일들의 연속이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으로 버티면 더 나은 미래가 절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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