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호우로 눅눅한 일상이 매일 반복되는 요즘이다. 코로나19가 다시 고개를 내밀기까지 하는 8월, 셀린시아마의 <워터릴리스>가 한국에 드디어 개봉했다. 2007년 개봉되었던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 10년 이후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을 향한 한국 팬들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집념의 한국인...!) 나 역시 작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가슴 들끓었던 20대 한국 여자였고, <워터릴리스>를 접할 방법이 없어 영상자료원에 자료 요청까지 했었던 터라 매우 기대가 되었다. 

셀린 시아마의 졸업프로젝트로 제출된 짧은 각본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워터릴리스> <걸후드> <톰보이>로 이루어지는 성장영화 트릴로지의 첫 시작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15살 마리는 우연히 대회에 출전한 수상발레부 주장, 플로리안을 보게 된다. 플로리안을 향한 마음이 점점 생겨나는 데, 마리의 친구 안느는 플로리안이 만나고 있는 수영부 남학생을 짝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세명의 여자 주인공들의 관계가 얽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01. 섬세한 감정 묘사  
불란서 영화아니랄까봐 이 영화는 주인공 '마리'의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관건이다. 처음 경험하는 사랑앞에서 이성은 사치일뿐. 마음가는대로 행동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그래서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일반적인 한국 정서로 따라가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뇌에 힘을 풀고, 마리의 시선에 나를 맡긴 채 영화를 감상했다. 

깡마르고 어리숙한 마리와 달리, 플로리안은 남자들에게 둘러 쌓여있다. 본인의 매력으로 이들 앞에서 보란 듯이 유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플로리안 또한 다른 여자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10대 소녀일 뿐이다. 외모에 대한 결점으로 고민하고, 자신에게 관심없는 수영부 남학생에게 마음을 뺏긴 '안'이라는 인물 역시, 내가 10대였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주변에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친구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 속에 사랑 관계까지 겹쳐버리게 된 세 명을 지켜보면서, 나의 청소년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마리, 플로리안, 안의 눈빛을 통해 전달되기에 내가 마리의 입장에서 지독한 짝사랑의 덫에 걸린 것처럼 느꼈을 정도다. 분명히 낯선 언어로 낯선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몰입되고 어디서 경험한 듯한 순간순간이 스쳐지나갔다. 

02. 가슴이 웅장해지는 미장센 

이처럼 나는 이 영화에 몰입하면서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을 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영상미아닐까?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 하나 없이 여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수영장, 마리와 플로리안의 방, 안느와 마리가 돌아다니는 거리. 2000년대 초반 특유의 색감으로 담아낸 이 모든 현실적인 공간들이 그 때의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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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여성 중심 영화 곧 죽어도 못잃는 이유  

사랑에 빠지는 과정 속에서 판단력을 잃어버린 듯한 젊은 여성은 제3자의 시선에서 대상화되기 십상이다. 10대 여성의 사랑을 다루는 영화를 볼 때는 항상 이런 면에서 경각심을 가지고 작품을 보게 된다. 사랑으로 인해 가슴앓이 하는 여성이 내리는 선택이나 행동은 '젊은', '어리숙한'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채 스크린에 담겨진다. 성인 여성처럼 보이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한 소녀가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주목받는 것을 '스스로 원한다'는 것처럼. 

나에게 관심 가지는 남자들에 불편해하고,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그럼에도 그러한 관심을 쉽게 놓지 못하는 플로리안과, 사랑에 빠진 상대를 좋아하고, 나를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는 안느와 마리의 간절한 마음들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모순으로 가득찼지만 납득되는 감정들을 불편함없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여성 중심의 영화가 여타 영화와 구분되는 점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