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신문사로 아침마다 팩스가 날아옵니다. 그 팩스에는 이런 지시문이 쓰여 있습니다. 그 기사는 보도하지 말 것. 그 기사는 작게 보도할 것. 그 기사는 꼭 1면에 실을 것. 그 기사는 반드시 맨 뒤 맨 밑에 실을 것.” 신문을 발간하기 전, 기사를 수정하라는 메시지들이 날아옵니다. 그에 맞춰 신문은 급히 수정되죠. 왜일까요? 대한민국은 분명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전혀 보장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입맛대로 신문을 펴내기 위해 기자들을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모든 신문의 1면이 같도록, 오후 5시가 되면 자신의 이야기가 뉴스에 울려 퍼지도록 만들었을까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국가’입니다. 이런 국가의 부당한 지침을 폭로한 사람들의 이야기, 연극 <보도지침>입니다.

 

 

 

 

 

연극 <보도지침>은 2016, 2017, 2019년에 이어 2021년 4연으로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보도지침>은 제5공화국 시절인 1986년 전두환 정권 당시,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월간 ‘말’지에 보도지침 파일을 폭로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대한일보 기자 주혁과 월간 ‘독백’의 발행인 정배를 보도지침 파일을 공개한 죄로 기소한 재판이 주요 배경이며, 최돈결 검사와 황승욱 변호사, 그리고 송원달 판사가 이 재판을 진행합니다. 사실 이 재판장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한국대학교 연극반의 일원으로 주혁, 정배, 승욱, 돈결은 같이 공연을 꾸리던 동기였으며, 원달은 이들의 선배이자 스승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계기로 서로를 심판하는 위치에 서있게 되었을까요?

 

 

실제 사건을 다루기에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하면서도 웃음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이 극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특히 4연에는 황희원 연출과 민활란 작곡가가 새롭게 합류하여, 새로 추가된 내용도 있고, 각색된 부분도 있는데요. 어떤 부분이 달라졌을까요? 이전의 공연을 보신 분이라면 이런 부분들도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 보지 못하신 분들께서는 이 기회에 극장을 한 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연극 <보도지침>TOM 2관에서 1114일까지 진행됩니다. 3주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추운 가을을 보낼 연극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211013 20:00 연극 <보도지침>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이 극에 대한 편견이 조금 있었습니다. 알아야 할 역사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1987>이나 <변호인> 등 같은 시대의 작품을 봤을 때, 고문 같은 폭력적인 장면이 적나라하게 나오는 점과 눈앞에 펼쳐지는 진실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아 일부러 피하는 편이었기에 첫 공연 이외에는 표를 잡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영화는 아무래도 미디어 매체이기에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을 알고는 있지만, 미리 대본집을 읽었을 때 글로만 읽는데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더 못 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볼까 말까 고민하는 작품은 일단 보고 생각하는 거더라고요. 첫 공연을 본 뒤,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물론 책상을 때리거나 파일철을 휘두르면서 나는 큰 소리는 지금도 놀랄 때가 있지만, 폭력을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고 배우의 연기와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연출로 본래의 의미는 망치지 않고 덜 긴장한 채로 극에 집중을 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번 <보도지침>을 보면서 맘에 드는 부분이 있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11006 20:00

 

 

공연은 김주혁과 김정배가 보도지침 파일을 폭로하는 기자회견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연극 <보도지침>은 커튼콜을 포함해 모든 촬영을 금지하는 대부분의 공연과 달리, 첫 부분의 기자회견 장면은 상시 촬영이 가능합니다. 객석을 바라보며 보도지침 파일을 폭로하는 주혁과 정배, 그리고 그들을 담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관객들로 하여금 실제 기자회견에 참여한듯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관객도 공연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는 거죠.

 

또한, 극 중에서 선택의 순간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 될 수도 단체의 선택이 될 수도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극의 배경이 되는 법정, 광장, 극장은 모두 선택의 공간입니다. 피고와 원고 중 누구의 손을 들 것인지, 도서관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있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광장으로 달려갈지, 곧장 행동하는 대신 연극으로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동아리방으로 달려가지,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의 유명한 구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남자가 건네주는 글을 읽는 돈결과 침묵에 침묵했던 원달. 저는 이런 선택들을 보면서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자신을 이룬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찰나의 순간일지도 모르지만, 그 찰나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는 결정이 될 수도 있죠. 이 극의 인물들도 그렇습니다. 한때는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사람이 한순간에 그 불꽃이 사그라들기도, 계속해서 자신이 택한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기도, 주저하던 상황에서 굳게 마음을 먹고 불의에 맞서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보도지침>은 그 선택의 순간을 극의 마지막에 관객에게도 던집니다. ‘이제 다들 어디로 갈건가’

 

 

 

 

어떤 인물처럼 행동할 것인지는 확실히 정하진 못하겠습니다. 비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솔직하게 제가 지금 당장 마음을 먹는다고 주혁이나 정배처럼 부당함에 대해 폭로를 할 만큼의 용기는 없거든요. 그렇다고 그저 현실에 굴복하여 살아가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넌 뭐 어떻게 살고 싶은데?’ 싶을 겁니다. <보도지침>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시대는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뀐다.
그때마다 시대의 부끄러움도 달라진다.
그때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그럼 넌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저는 원달이 객석을 바라보며 이제 다들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마지막 대사가 이 극이 계속해서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지점입니다. 관객에게도 생각해볼 질문을 던짐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죠. 부끄럽지만, 저도 이 극을 보기 전까지는 보도지침 파일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이 시대에 언론 통제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보도지침>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사건을 알게 되었고, 관련된 사건들을 찾아보면서 명백히 피해자가 존재하고 그들이 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이용하여 그 소리를 묵살하는 그 시대 국가의 파렴치한 행적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또 생각합니다. 과연 이게 1980년대만의 문제일까요? 소위 신뢰도가 높아 믿을 수 있는 매체라 분류되었던 신문기사였지만, 잠깐만 둘러보아도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성별 표기에 아직도 차별을 두는 세상. 연극 <보도지침>이 올라오는 한편, 뮤지컬 <박정희>가 뮤지컬 예매율 1위를 하는 세상. 2021년은 변화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보도지침>을 보다 보면 지난 5월에 봤던 음악극 <태일>이 생각납니다. 같은 극장에서 올라왔기도 했고 극 중에서 원달이 전태일의 장례식을 올렸다는 이야기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와 같은 외침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신문 귀퉁이에 아주 작게 적힌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계속 월간 ‘독백’을 발간하겠다는 정배를 보면 ‘나는 기억되고 있습니까’라는 <태일>의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들을 기억할 차례입니다. 이 사건의 장본인은 아직도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그렇기에 이 일을 기억하고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지켜봐야 합니다. 저 같은 개인도 잘못을 하나 하면 다시는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노력합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국가가 저질렀던 잘못이 되풀이되면 안 되겠죠. 이런 목소리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면, 승욱이의 최후 독백처럼 ‘우리는 그 어떤 아름답지 못한 지침에도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