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 슬픈 사건에 대해 더 얘기해보자. 이 세상에서 줄리엣과 로미오의 얘기보다 더 슬픈 얘기는 없으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들어봤는가? 아마 다들 정확한 줄거리는 모를지라도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나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을 이야기로 꼽히는 것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금까지도 여러 연극, 뮤지컬의 소재, 상징으로 다수 등장한다. 여기 그를 극중극으로 가져와 네 명의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연 한 편이 있다. 바로 연극 <알앤제이>다.

 

연극 <알앤제이>는 1910년 가톨릭 학교의 학생들이 금서로 여겨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면서 깨달은 감정들로 이루어진 극이다. 보수적인 학교인 만큼 학생들은 평소 라틴어, 수학, 물리 등의 규칙적인 수업과 종소리만 들어도 경직될 정도의 엄격한 규율과 체벌 속에서 생활한다. 모두가 잠든 어느 늦은 밤, 네 명의 학생은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와 붉은 천으로 숨겨져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발견하고, 서로에게 이름을 선사하며 한 장면 한 장면을 연기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마라’를 외치며 억제해왔던 학생들의 감정과 달리 솔직하게 표현된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어가며 이 이야기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분명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지만, 학생들은 극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극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한 가지는 학생들이 이름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학생’이라는 역할 뒤에 1, 2, 3, 4라는 출석번호 같은 숫자만이 붙어있을 뿐. 하지만 낭독을 시작하게 되면서 ‘벤볼리오’, ‘머큐쇼’, ‘로미오’, ‘티볼트’, ‘줄리엣’ 등 여러 이름을 부여받는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대사를 따라 하지만 점차 몰입하며 재미를 느껴가고, 그를 넘어 주인공의 고난을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교리들과 동일시하며 인물에 자신을 투영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 개인과 등장인물로서의 ‘나’가 공존하는 그 불투명한 경계가 참 좋다.

 

여기서, 내가 만약 ‘<알앤제이>의 학생’이 된다면, 네 명의 학생 중 어떤 배역을 맡게 될까?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쓰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이고 바람이니까. 난 학생 1이 되고 싶다. 이 극을 처음 본 날 무엇이라 딱 정의할 수는 없지만 슬프고 먹먹한 감정들에 사로잡혀 터덜터덜 이해랑 언덕을 내려왔다. 학생1이 던진 붉은 천이 나에게 와서 화살로 꽂힌 기분이었달까. 학생 1은 처음 금서를 발견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자 다른 학생과 달리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극 중간중간에도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무의식적인 규율에 따라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마다 ‘지금은 깊은 밤’을 외치며 다시 극을 이끌어 나간다.

 

학생 1은 다른 학생들보다 단단한 듯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수업 시간에 그는 노트에 사랑에 대한 시를 쓴다. 극 초반에 그가 자신의 사랑을 정의할 단어를 찾는 데 몰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 로미오라는 역할도 그를 도와줬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열병이라는 단어로 정의했지만. 나는 학생 1이 ‘로미오’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그가 느끼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며 한 발짝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극을 통해 자신이 가진 한계와 규율을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한순간의 놀이에 불과할 수 있는 연극을 끝내지 못하고 계속 붙잡으며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학생 1을 고른 이유는 학생 1이 로미오에서 자신을 봤듯이 조금은 결이 다를지는 모르지만 나도 학1에게서 나를 봤다고 해야 하나. 평소의 나도 나의 일에 관해서는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게 실은 어려운 길일지라도 내가 그를 인식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과정에서 얻어가는 게 분명히 있을 거고, 그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니까. 꿈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앞선다는 것도 괜히 학1이 던진 것들을 내가 고스란히 전달받는 기분이 든다. 천이 화살처럼 꽂혔다는 느낌은 아마 그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사실 붉은 천(대배우님)을 던지고 싶은 욕망도 크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마라! 붉은 천은 칼이 되기도, 드레스가 되기도, 독약이 되기도, 줄리엣의 침실이 되기도 하며 극의 주요 소품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에 학생 1이 리프트에 올라가서 이 천을 촤라락 던지는 장면은 단순히 언제 봐도 멋있어서 나도 해보고 싶다. 어젯밤에 꿈을 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