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이 된다면 _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파랑파란_11월

 


“가정법이요. 무언가가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상상하고 얘기하기 위한 문법형식.”

 

내 파랑파란 프로젝트의 티저 문구였던 가정법(Subjunctive)은 바로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이하 ‘히보’)의 위 대사에서 가져왔다. 히보는 지난 11월 8일에 막을 내린 2020년 공연을 포함해 한국에서 총 다섯 번 무대에 올려졌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그동안 계속해서 쏟아지는 문학작품, 영화, 음악 같은 텍스트 때문일까 관객은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면서 위로받아 엉덩이가 아픈 것도 잊고 보게 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러한 이유로 너무나도 사랑하는 인생극이기에 첫 번째 작품으로 골랐다.

 

잠시 내용을 살펴보자면, 1980년대 초 영국 셰필드의 한 고등학교 옥스브릿지 특별반엔 대학입시를 앞둔 8명의 학생과 이들을 가르치는 문학교사 헥터, 역사교사 어윈이 있다.

헥터는 고전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을 연기하고 프랑스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등 수업에 다양한 문학을 인용하면서 ‘죽은 자들이 남긴 빵을 나눠 먹는 동맹의식’이라는 시험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위한’ 수업을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딩처럼 말이다. 반면 어윈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따내기 위해 채용된 교사로 뻔하지 않은 레포트를 위해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이미 증명된 사실에 반박할 증거를 찾아내는 방법을 알려줘 학생들을 대학 합격의 길로 이끈다.

이처럼 두 선생님의 수업은 시간 낭비와 요점 정리라고 구분 지을 정도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균형을 잡으며 배움의 길을 걸어간다.

 

그렇다면, 내가 만약 ‘옥스브릿지 특별반 학생’이 된다면, 헥터와 어윈의 수업방식 중 어떤 것을 더 선호하게 될까?

 

모든 걸 배제하고 수업만 생각했을 땐 헥터 수업을 좋아했을 거 같다. 그는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시를 배우고 싶게 만들 정도니까. 상상해보라. 수학 문제 100개, 영어 단어 200개 공부할 시간에 배우처럼 영화 속 장면을 연기하거나 노래하면서 게임 하듯 수업한다면?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을 거다. 내용도 교과서에 제시하는 순서에 따르지 않고 학생들이 결정하니까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까 싶고. “문학은 위로의 수단이다”라는 데이킨의 말처럼, 작품 속 인물에게서 나를 보게 될 때, 나만 느낀다고 생각했던 걸 누군가 함께 생각하고 공감하며 내 손을 잡아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헥터의 방식이 아무리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해도 어떤 수업도 채워줄 수 없는 마음의 단열재를 만들어주는 그의 수업을 좋아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헥터의 성추행을 생각하면 그의 수업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삶을 길게 보고 그를 위한 수업이 좋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가 저지른 행동은 명백한 범죄다. 수업이 흥미롭다고 그의 잘못마저도 감싸주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이 좋은 음악, 연기로 보답하겠다며 정상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점이랑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험이 존재하는 한 어윈의 수업방식을 따를 것 같다. 현실이니까. 내가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21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양한 시험 속에 끊임없이 던져져 왔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 기준에 맞춰서 살아왔다. 그래야만 좋은 대학, 좋은 직장 흔히들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니까. 남들이 설정해놓은 ‘성공한 삶’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는 제자리인데 다들 한 칸씩 앞으로 가는 걸 보면 조급해지기도 하고 결국은 이게 돈으로 삶으로 이어지니까 다른 루트로 갔을 때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그 기준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윈이 그 공략 스킬을 알려준다는데 어떻게 안 끌릴 수 있을까.

 

특히 요즘 같은 시험 기간에 레포트를 쓸 때면 더욱 어윈이 생각나곤 한다. 하나 적어보자면 미술사 수업에 이 미 수없이 존재해왔던 누드 작품에 문제를 제기한 레포트를 적으면서 평소 역사를 줄줄 읽는 거 같아 지루하다 고 생각했던 내용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미 나는 어윈의 수업을 약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네.



@xiawaxe